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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성사 / 조르조 아감벤 / 정문영 옮김 / 2012년 9월20일
p121 : 맹세는 선언도 아니고 약속도 아닌 다른 것, 푸코 식으로 말하자면 ‘진실 말하기’로서, 그것을 소리 내어 말하는 주체와의 관계만을 그것의 수행적 효력의 유일한 규준으로 가지는 말이다. (...) 진실 말하기에서 주체는 자신이 하는 확언의 진실성과 수행적으로 결합됨으로써 스스로를 구성하고 그러한 것으로서 자신을 살아 움직이게 한다.
p131 : 따라서 우리는 몸짓과 말 사이에는 심원한 관계가 존재하며, 그것들을 함께 묶어주는 엄격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rem manu capere'(손으로 물체를 잡다)와 'nomen verbis capere'(말로 이름을 삼다), 이 둘은 이렇듯 완전한 포획 행위의 두 개의 주촛돌이다.
p142 : 다시 말해 인류는 언어에 자신의 본성을 걸었던 것이다. 인간은 푸코의 말대로 ‘정치에 생명체로서의 자기 실존을 건 동물’ 인 것만큼이나 언어에 자신의 목숨을 건 생명체인 것이다. 이 두 개의 정의는 사실상 떼려야 뗄 수 없으며 본질적으로 서로 기대어 있다.
맹세와 같은 것이 생겨날 수 있으려면 사실상 무엇보다도 생명과 언어, 행위와 말을 구별하면서도 또 어떤 식으로든 서로 맞물리게 할 수 있어야만 한다. (143) 이러한 분할 속에서 인간은 자기의 언어를 자신의 행위에 대립시키면서 언어에 자신을 걸 수 있고 로고스에 자신을 약속할 수 있는 것이다. (...) 맹세 또한 말하는 동물이 언어에 자신의 본성을 걸고 말과 사물(사태)과 행위를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차원에서 하나로 묶어야만 하는 절박한 요구를 표현한다.
p145 : 한편에는 갈수록 더 순전히 생물학적인 실재로, 벌거벗은 삶으로 축소되는 ‘살아있는 존재자’가 있다. 다른 한편에는 미디어 테크놀로지에 기반을 둔 각종 장치들을 통해 더욱 더 공허해져버리는 말의 경험 속에서 인위적으로 전자에서 분리되는 ‘말하는 존재자’가 있다. 그러한 말에 대해서는 책임지는 것도 불가능하고 또 그러한 말 속에서는 정치적 경험 따위는 갈수록 더 미덥지 못한 것이 되어버린다. 말과 사물(사태)과 인간의 행위를 하나로 묶어주는 (인지적일 뿐만은 아닌) 윤리적인 연관이 깨지면 사실상 한편으로는 공허한 말이, 다른 한편으로는 입법 장치들이 대대적이고 유례없이 만연해 더 이상 통제 불능으로 보이는 그러한 삶 전반을 법으로 집요하게 틀어쥐려고 한다.
p146 : 인안의 언어는 자신의 속을 비워내어 화자가 말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떠맡아야만 하는 어떤 형식을 자신 안에 마련한다는 사실에, 다시 말해 화자와 그의 언어 사이에 설정된 윤리적 관계에 있는 것이다. 인간은 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라고 말해야만 하고, ‘말을 붙잡고’ 떠안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만 하는 생명체이다.
[옮긴이 후기]
p152 : 아감벤은 맹세의 기원을 인간이 신의 복수나 처벌을 정말로 두려워했던 인간 역사의 ‘주술-종교적’ 단계에서 찾았던 것이다. 그러한 한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는 맹세는 그러한 원시적 단계의 잔존물로 보이게 되며, 종교적 믿음의 쇠퇴와 더불어 ‘원초적 무구별 상태’(프로디)에서 벗어나 그 기능이 각각 법, 종교, 과학으로 분화되어 전문화되는 역사적 시기를 거치면서 필연적으로 쇠퇴할 수밖에 없는 제도로 나타나는 것이다. (153)맹세는 주술, 종교, 법 어느 하나로 환원될 수 없는 미분화된 통일체, 다시 말해 동시에 종교적이고 법적이고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제도로 나타나며, 맹세가 주술-종교의 영역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역으로 종교, 법, 과학이 맹세에서 배태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종교, 과학, 법의 분화는 맹세에 속하는 어떤 고유한 경험의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반작용일 것이다.
p153 : 맹세의 형식들, 이를 테면 ‘나는 (...) 맹세한다’ ,‘나는 (...) 약속한다’ , ‘나는 (...) 선언한다’ 등의 발화 행위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론적인 내용을 지니지 않으며 또 어떤 사물이나 사태를 지시하지도 않는다.
p154 : 모든 말은 이미 맹세를 전제하는, 아니 말한다는 것은 곧 맹세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를 전제로 하면 맹세는 생명과 언어, 행위와 말의 결합이 필연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님을, 이 둘 사이에는 끊임없는 어긋남, 메울 수 없는 틈이 있음을 역설적으로 증언한다. 왜냐하면 이 둘 사이에 어긋남이 없다면 맹세란 애당초 필요치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인간을 ‘언어를 가진 생명체’(플라톤)라고 할 때 이 ‘가짐’은 신의 섭리에 의해 보장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말하는 ‘나’는 생명과 언어 사이의, 말과 행위 사이의 틈 속에 유예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을 하는 존재자로서의 인간에게는 끊임없이 어긋나는 이 둘 사이를 맞물리게 해야만(그럴 때만 주체와 같은 것이 존재할 수 있다)하는 임무가 존재론적 숙명처럼 주어져 있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맹세는 “말하는 동물에게 어떤 의미로건 결정적인 요구, 즉 말하는 동물이 언어에 자신의 본성을 걸고 말과 사물(사태)과 행위를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차원에서 하나로 묶어야만 하는 절박한 요구를 표현”하는 것이다. 또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맹세의 쇠퇴는 곧 ‘인간의 존재 자체가 걸린 위기’인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유례없는 말의 성찬 속에서 - 그리고 이와 짝을 이루는 유례없는 ‘법의 힘’ 앞에서 - 다시금 맹세가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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