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장 티베트 역사 공동체 티베트, 토번, 서장, 시장, 시짱 티베트는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를 받고 있는 역사 공동체들 가운데서 그 정체성을 가장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는 역사 공동체의 하나이다(p. 632). 활동 공간 티베트 고원: 위, 짱, 캄, 아리, 암도 등으로 구별됨. 장남: 농사가능, 인구와 도시 밀집. 위짱(우창)이 티베트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 장북: 농경 거의 불가능, 목축 가능, 창탕 장동: 임업과 목축업, 농업 고산 협곡, 캄 티베트 고원은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도가 높고, 연 평균 기온이 현저히 낮으며, 강우량과 공기량이 말할 수 없이 적어서, 중국인이나 인도인, 몽고인등이 이처럼 높고 춥고 건조한 숨찬 곳에서는 살아가기 어렵기 때문에, 티베트 고원의 ..
제5장 강저 역사 공동체 중국과 더불어 고대 동아시아 세계를 구성했던 서융, 서융은 저와 강 등 유구한 역사를 가진 공동체로서 갑골문에도 보인다. 강과 저는 별개의 부족이었으나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어서 생활습속이나 문화가 비슷하여 역사적 발전과정에서 점차 하나의 역사 공동체로 융합되었다. 강저계의 인구는 청해와 사천, 운남, 귀주 등의 깊은 산과 골짜기에 흩어져 살았으며, 이러한 지리적 특성으로 통일된 국가를 건립하지 못했다. 한대에는 변군체제에 편입되었고, 위진남북조 시기에는 흉노와 갈, 선비 등과 오호(五胡)를 구성 전진과 후진, 후량, 구지국, 탕지국, 토욕혼 등을 건립, 5호16국과 남북조의 다른 국가들과 경쟁했다. 당시기에는 남조라는 국가를 건립, 당과 힐항했고, 송과 요, 금이 중국을 분점했을..
제2부 제3장 서역(西域) 역사 공동체 ‘서역’이란 말은 한대(漢代)에 중국에 처음으로 알려져 그 존재가 기록되었다. 서역인이 동아시아 세계의 일원으로 참여하게 된 것도 한대(漢代)부터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인이 사용한 서역이란 말에는 광의와 협의 두 가지로, 광의의 서역이란 중국의 서방에 있는 일체의 공간적 범주를 통칭하는 것이고, 협의의 서역은 지리적으로는 흉노와 오손의 남쪽에 있었고, 남북에는 큰 산(천산)이 있었으며 중앙에는 타림하가 있고, 동서는 6천여 리, 남북은 1천여 리에 이르렀다. 정치적으로는 서역 도호가 관리하던 범위를 말한다. 옥문관과 양관에서 서역으로 나가는 길은 두 갈래가 있었다. 서역에 사는 사람들은 유목 수렵과 농경을 겸했고, 소규모의 오아시스 성곽 국가를 건립하여 운영하고 있..
9. 요동도사(遼東都司)와 여진(女眞) 10세기 이후의 요동사는 일반적으로 요동에서 출현한 세력이 요동 전역을 석권한 뒤에 중국으로 들어가 요동과 중국을 통합, 지배하는 국가를 건립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그것은 거란이 요동을 통일한 뒤 요(遼)를 세워 중국의 연운(燕雲) 16주까지 통합지배한 이래로, 여진이 요동을 통일한 뒤에 청(淸)을 세우고 입관하여 중국과 요동을 함께 통합. 지배할 때까지, 무려 1천여년 가깝게 지속된 하나의 큰 역사적 흐름이었다. 그러나 명이 몽고를 중국에서 축출한 뒤 요동 서부까지 진출, 일시적이나마 요동의 일부와 중국을 함께 지배하는 상황이 일어났다. 이 시기 거란과 여진은 통일 국가를 건립하지 못하고 분산되어 있었고 명의 위소(衛所)체계안에 편입되어 간접적, 집단적 방식으..
9장 유럽의 상상력과 제1차 세계대전 1. 1905년의 세대 1905년, 러시아에서의 혁명과 ‘피의 일요일’, 모로코에서 프랑스와 독일이 제국주의적 노선을 두고 충돌하던 ‘제 1차 모로코 위기’ 등 시대적으로, 외교적으로 떠들썩한 시기이자 이후 1차 세계대전의 ‘분수령’이라고 휴즈는 표현합니다. 국가와 세계정세의 불안 속에서 언제 임박할지 모르는 전쟁의 분위기 속에서 살아가던 시대였고, 많은 젊은이들은 군대에 복무하는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1905년을 기점으로 우리가 앞서 읽어왔던 지성들은 이미 나이 들었고 종군과 거리가 먼 상황에서, ‘그들 아들들의 전쟁’(356)이라고 언급하며, 전쟁의 경험을 기점으로 지성의 연령 집단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1890년대 저술가들이 ‘이성의 가능성에 대한 회의에는 자..
제8장 베버의 사회학 - 실증주의 및 관념론의 극복 서론: 뒤르켐과 실증주의의 잔재 뒤르켐은 실증주의 경향이 가장 강했으며 차츰 관념론적 관점으로 발달해 나갔다. 궁극적인 함축은 ‘정신적’임에도 불구하고 방법론은 실증주의적이고 기계론적이기도 했다(298). 그가 사회학자가 된 이유는 보다 구체적이며 직접적으로 사회적 현실과 관계되는 학문을 수립하고 싶었고 제3공화(299)국의 도덕적 강화에 기여하고 싶다는 욕망에 있었다. 민주주의적·인도주의자였는데 그는 참된 계몽주의자였다(300). 평생 프랑스 정부의 충실한 공무원으로(299) 프랑스 사회과학 연구 전체를 그의 사회학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독일-이탈리아의 지적 세계에서는 격리되어 있었다. 현재 뒤르켐은 주변적 인물에 지나지(300) 않는다. 뒤..
『지식인들의 망명』 5장 3-4절 스튜어트 휴즈 2022.3.9. 바다사자 3. 에릭슨과 ’정체성‘의 의미 [ 에릭슨의 성숙기의 활동은 완전히 미국이라는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하르트만이 자신의 이론체계를 완전히 마무리지은 직후에 활동이 시작되었다. ’막간 이론에서 그는 하르트만의(270) 기술적인 용어 ‘자아ego’는 자기 동일성과 명백하게 구분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했다. 정체선에 대한 강조는 에릭슨이 표현하려는 핵심이었다. 빈의 실험적인 학교에서 안나 프로이트를 만나 교육분석을 받았고 임상 절차에 관한 정식훈련을 받았다. 창시자들의 후계자들이 자리를 굳히고 있던(272) 빈에서 비이론적 정신의 소유자는 포위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감지하고 미국으로 이주했다. 1934-35년 하버드 의..
제 7장 마키아벨리의 후계자들(파레토, 모스카, 미헬스) 이 마키아벨리 학파의 이탈리아 및 이탈리아계의 대표적 인문들-파레토, 모스카, 미헬스는 20세기 초의 가장 창조적인 인물로 꼽히지 않는다. 폭넓은 상상력과 사회사상의 범주에 대한 세련된 이해라는 면에서 그들은 프로이트나 베버나 그들의 동포인 크로체와 같은 자리에 설수 없다.(268) 파레토와 모스카는 반형이상학적이고 매우 실제적인 경향을 가졌다는 점으로 이탈리아 전통의 참된 계승자들이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문필상의 교우관계를 지속했다. 파레토는 『일반사회학』 - 오직 경험으로부터만 이끌어낼 수 있는 일반 이론을 가지고 소렐이 다른 분야에서 하고 있던 일을 성취하려고 노력 했다고 말했다. 미헬스는 파리에서 『폭력론』 발간 직전에 소렐과 알게 되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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